2001년 여름 몽고 아르항가이에서 요즘 산은 여름, 그
짙은 초록의 빽빽함 보다 듬성한 여백를 느낄 수 있어 좋다.사는 일에서도 이처럼 여백을 가지고 살아야지..
게르에서의 아침
아르 항가이에서의 하루
말을 타고 나간 사람들이 아직 돌아오고 있지 않다.
지금은 저녁 6시가 훨씬 넘었는데 이곳은 해가 중천이다. 밤 10시가 되어야 일몰이 시작되는 몽고 초원 아르 항가이.
떠나오기 전 생각했던 초원의 넓이가 상상을 초월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초원. 나무 한 그루 서있지 않은 푸른 벌판. 그 푸름 속에 노랑, 빨강, 보라 색색의 꽃들이 무리를 지어 있다. 흔하게 볼 수 없었던 하얀 에델바이스도 지천이다. 한참을 바라보면 초록의 어른거림으로 현기증이 일어난다.
오늘 나흘 째, 첫날부터 8 시간 말을 탄 탓에 너무 무리를 했는가 살이 짓무르고 힘이 들어 오늘 오후는 게르에서 쉬기로 했다.
게르의 문을 열어 놓고 누워 책을 보다가 마주친 하늘이 구름 한 점 없는 코발트빛이다.
옆 식당 게르에서 몽고리안들이 부르는 노래 소리가 무척이나 구슬프고 길게 이어진다. 우리의 가락과 비슷한 5음계 조의 노래가 들을수록 친숙하다.
환상속에 빠져있는 듯, 꿈을 꾸고 있는 듯 아득하다.
며칠동안 외부와는 단절되었던 시간들.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 시간을 인식할 필요가 없고 악다구니할 필요도 없이 해주는 밥 먹고 말을 타고 초원을 돌다가 이웃 게르에 들러 마유주를 마시고 그 곳 사람들과 조우하고 돌아오면 초원의 일몰이 시작된다.
굽이굽이 나무가 없는 산들이 가지각색을 띠기 시작할 즈음에 초승달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아~ 아르 항가이의 밤하늘.. 내가 머무는 게르에서 오른 쪽으로 카시오페아가 보이고 그 옆에 북두칠성이 나타난다. 그리고 왼 쪽으로 길게 은하수가 흐른다. 어디쯤 성운이 있기에 그 많은 별들이 쏟아져 나온 것일까?
문득 몽고에 온 지 닷새가 지나도록 속세를 떠나온 것처럼 아무 생각을 안하고 지냈다는 것을 깨닫는다. 신기하다. 이제 내일이면 이곳을 떠난다는 생각이 잊었던 현실들을 일깨우고 있는 것일까.
나흘동안 그 새 정이든 옅은 갈색의 4년생 암 말, 짧은 영어보다는 몸짓으로 더 말을 잘하고 내게 한국 노래를 부르라고 졸라 '사랑해 당신을' 불렀더니 신기해하며 그 다음부터는 늘 말을 타고 가면서 내가 듣기 좋아하는 몽고 민요를 불러주었던 21살의 청년 '어떠거'.
대학에서 일어를 전공하여 유창한 일어솜씨에 한국말도 잘하고 영어도 잘하여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었던 우수어린 눈빛을 가진 26살의 아기아빠인 부르너.
대학을 나오고도 한 달에 35 달러를 벌기 위해 이 아르항가이 시골에서 외지인들에게 정성을 다하는 그들의 모습은 참으로 감동적이다. 직업이기 이전에 인간적인 순수함을 아직 간직하고 있는 그들에게 우리나라는 무지개 나라란다.
한 때 아시아를 호령하던 힘의 역사를 가진 몽고 민족, 우리와 유사한 모습의 그들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 칭기스칸의 그 화려한 역사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은 그들. 같은 멸망의 길을 갔어도 로마는 그 옛날 조상들의 흔적으로 지금 관광 수입을 벌어들이고 있지 않은가
유목민 특유의 떠돌음 때문에 무언가 남기는 것에 익숙치 않은 것일까
사회주의에서 벗어난지 10년째의 이 땅은 가난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내일이면 9시간 동안 햇볕이 짱짱한 마른 길을 달려 울란바토르로 갈 것이다.
욕망의 허무함을 깨달아야 진정한 집에 돌아올 수 있다지. 이곳 아르 항가이에서 조금쯤은 나의 짐을 내려놓은 듯 하다. 삶의 어느 순간 닥칠지 모르는 균열의 순간을 수습할 수 있는 여유라는 에너지도 흠뻑 얻은 듯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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