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엄마에게 나는 특별한 자식이었나 봅니다.
자라면서 다른 형제들은 엄마에게 떼쓰고 대들고 해도 끄떡없이 받아주시던 엄마가
내게는 유독 그러질 못하셨습니다. 중학교 땐가 무슨일이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무튼 처음 엄마에게 소리지르고 대들었는데 그 순간 엄마가 정신을 놓으시고 말았습니다.
어찌나 놀랬던지.. 아마 이런 일은 성장하면서 두 세 번 있었을까..
나는 엄마가 어찌될까봐 참으면서 철이 일찍 들었던거 같습니다.
고등학교 때 학교에서 돌아오자 엄마께서 던지던 한 마 디
‘사주를 보니 셋째 딸하고 살게 될 거 란다.’
그때만 해도 절에 다니시던 엄마가 구정이 지나 한 해 사주를 보고 오신 모양입니다.
어릴 때 인데도 그 말이 어찌나 가슴에 박히던지.. 그랬을까 결혼을 하고 첫아이를 키워주시러 오셔서 내내 우리집에서 살게 되었지요.
요양원에서 3년 남짓. 짜증도 많이 내고 힘들다고 어서 돌아가시라고도 했지만
난 엄마란 영영 그냥 살아계시는 줄 알았답니다. 식사도 못하시고 정신도 가끔 놓으시다가도 또 회복하시기를 반복하니 이번에도 또 괜찮아질거란 믿음이, 아니 모르겠습니다. 그냥 엄마는 늘 살아계셔야 하는 것. 어떤 모습이어도 그저 내 삶 한귀퉁이에서 계셔야 한다는 것.
돌아가셨다는데 아무리 들여다봐도 주무시는 것 같았답니다. 옷을 갈아입히는데 누워계실 때 그렇게 펴 드리려고 아무리 운동을 시켜도 굽어만 있던 다리를 쭉 펴시고 계시니 더 편안해 보였습니다.
연화장 ‘추모의 집’에 모시고 보니 이제야 실감이 납니다. 정말 병원도 아니고 이제 저기 계시는거구나.. 살아서 오그렸던 다리 비로서 쭉 펴신 것 처럼 89해 또아리 틀었던 가슴속 응어리들도 굽이굽이 풀어 버리시라. 엄마...
어른들이 살아계실 때 잘해드리란 말이 너무 상투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이네요. 스물 다섯 해 나를 키워 주신만큼 나도 당신을 모셨으니 되었다고 마음속으로 앙앙대기도 했으니..
누우면 끊이지 않는 지난 세월이 잠을 설치게 합니다. 한도 없이 꼬리를 무는 걸 보면 엄마와 산 세월이 그만큼 길었다는 것, 그리고 나도 그만큼 많이 살았다는 것이겠지요.
恨이 많아 한껏 울었답니다. 그 울음속으로 엄마에게 빌용서를 묻어보냅니다.
사순절에 돌아가시면 천국문이 활짝 열려있다네요. 그 말에 위안을 삼습니다.
이제 ‘엄마’를 부를 일이 없다는 것. 영영 가슴속에 담아야 하는 그 단어. 때문에 더욱 서럽답니다.
내 슬픔에 함께 해주신 분들께
큰 위로가 되었음을 전하며 다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