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한 기간
명퇴 서류를 만드는 날
올 9월에 새로 부임한 관리자는 화들짝 놀란다.
- 아니 .. 왜요? 내가 몰 불편하게 했나요?
- 아니요. 올 초부터 수요조사 했던건데 이제 서류를 만드는 거지요.
떠날 때가 된거 같아요.
-떠날 때라니요?
- 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한 거 같아요.
- 남편은 모라던가요? 허락하던가요?
이 부분에서 웃음이 났다. 허락이 없으면 못하는거구나..
어쨌든 그동안 막연하게 그만둬야지 했던 생각이 실제로 옮겨졌다.
이제 실감이 나는 듯 그동안 26년의 세월이 자근자근 머릿속을 맴돈다.
집에 돌아와 저녁준비를 하면서 김장하고 남아 베란다에서 뒹굴고 있는
파를 다듬는다. 참 오랜 세월이었다. 아까 답한 ‘ 떠날 때’에 대한 깊은 생각을 해본다.
사람이 살면서 이 ‘때 ’를 안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가. 이 때를 알고 대처한다는 것이 삶을 살아가는 기술이 아닐까
종종거리며 살았던 세월이 토막토막 떠오르면서 좋았던 기억보다 힘들었던 기억이 더 많다.
애들키우랴 직장생활하랴 몸이 피곤하다는 이유로 지나쳤던 많은 것들.
마누라 노릇, 엄마 노릇을 더 잘할 수 있었을까
시댁에서 눈총 안 받고 잘 할 수 있었을텐데.. 딸 노릇은 어떻구. 등등
내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회한이 더 많이 일어난다.
두 손에 잔뜩 묻은 흙을 털고 일어나려는데 핸드폰이 울린다.
- 쌤~ 아웃 백 갈 준비하세요. (뜬금없는 목소리)
- 모얌 마~~
- 저 다 담주에 군대가요. 올 2월 졸업한 경준이다.
- 아니 왜 벌써가니?
- 사람 좀 되어 보려구요. 군대가면 사람된다고 해서요. ㅋㅋㅋ~
아.. 이거구나 이제 이런 일들과의 이별이구나.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은 없다. 그저 이렇게 허덕거리는 생활에서 놓여나고 싶다는 것 뿐.
좀 다른 패턴으로의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것 뿐.
나는 지금 인생의 내향기內向期를 맞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가 자못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