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그리운 종로
방학중에 방 하나를 서재로 꾸며보자고 하여
그동안 쌓아놓았던 책 보따리를 풀게 되었다.
버릴것은 버리고 정리하면서 새삼 지나간 시절을 반추하게 되는건..
책갈피에서 우연히 떨어져 나온 낙엽하나
메모들.. 그리고 사진
그래서 하루에 끝낼 일이 사흘을 갔다.
책도 책이지만 결혼전에 모아온 LP 디스크들.
200 장가까이 되었던 것을 이사하면서 복사판이랑 그저 그런것은 대충 버리고
한 50여장이 아직 남았다.
근데 우리집 오디오엔 턴테이블이 없다. 그러니 들을 수가 없을수 밖에
그래도 버릴수 없는건 요즘 너무 완벽한 CD 음악이 내겐 때로 기계음으로 들려
예전에 듣던 LP의 잡음이 그리운 것이다.
그리고 이 LP에는 내 70년대의 삶이(?) 고스란히 스며있다.
지금처럼 오디오 시스템이 발달하지 않았던 그 시절
음악을 듣기 위해서는 음악 감상실이란 곳을 가야했다.
고딩때도 몰래 드나들었던 종로통 음악감상실.
지금 종로 2가에 있던 3층짜리 건물
1층은 '희다방' 으로 주로 가요를 들을 수 있었고, 2층은 '칸토 (나중에 무아로 이름이 바뀜)
는 주로 pop을 듣던 곳, 3층은 '르네상스'로 고전음악 감상실이었다.
1층 희다방은 거의 안가고 주로 2, 3층 단골이었다. ㅋ~
2층 칸토에 가면 DJ 가 의례 king crimson의 'epitaph'을 들려주었고
서울시내에서도 몇군데서 들을 수 없었던 샹글리라스의 음반을 거기가면 들을 수 있다는 이유로
거의 매일을 드나들었던거 같다.
그때도 지금처럼 철이 없기는 마찬가지
그때 티나 크랙커가 50원에 다방 커피값이 50원이어서 100원이면 점심을 해결했던 시절
(뒤에 결혼 해서 소마니 살 때, 첫애 임신해서 제일 먹고 싶었던 게 바로 이 티나 크랙커였다 ^.*
물론 울 신랑 퇴근해서 오는 길에 옷속에 티나크랙커 한 판씩 있었다 )
너무나 가난했던 내 대학시절은 그것도 힘들었지만
그 점심 굶어가며 모은 돈으로 LP 판을 샀다. 쯔쯔~
그러니 내가 이 음반을 어찌 쉽게 버릴수 있으리~
얼마전에 혼자 수지에서 근사하게 살고 있는 친구집엘 갔었다.
고전음악 메니아인 그 아이는 거실에 브라운관까지 딸린 오디오를 가지고 있었다.
그 애가 좋아하는 말러를 들으면서 어찌나 부러운지
이 기회에 나도 함 설치해 볼까 욕심을 부렸는데 만만치 않다.
중고도 한 300 정도 들었다니 말이다.
누구 집에 안듣는 턴테이블 있음 저 주세요!!
지금 종로 거리는 더 번화해지고 유흥업소들로 흥청거리지만
70년대는 주로 학원가였다. 그래 지금 그 거리에 서면 왠지 그때 그 고즈넉함이 그리워진다.
르네상스에서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을 들어야 왠지 으쓱하는 기분이 들던 그 시절
몇 해전 그 건물이 없어진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렸을 때
가슴에 추억하나가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가을이면 그 거리에 물들었던 은행나무마저
내게는 색다르게 느껴졌던 그 기억은 아마
씽씽 정신없이 돌아가는 디지털 시대에
내 삶 귀퉁이 여백처럼 남아있어 더욱 그리운가 보다.
그동안 쌓아놓았던 책 보따리를 풀게 되었다.
버릴것은 버리고 정리하면서 새삼 지나간 시절을 반추하게 되는건..
책갈피에서 우연히 떨어져 나온 낙엽하나
메모들.. 그리고 사진
그래서 하루에 끝낼 일이 사흘을 갔다.
책도 책이지만 결혼전에 모아온 LP 디스크들.
200 장가까이 되었던 것을 이사하면서 복사판이랑 그저 그런것은 대충 버리고
한 50여장이 아직 남았다.
근데 우리집 오디오엔 턴테이블이 없다. 그러니 들을 수가 없을수 밖에
그래도 버릴수 없는건 요즘 너무 완벽한 CD 음악이 내겐 때로 기계음으로 들려
예전에 듣던 LP의 잡음이 그리운 것이다.
그리고 이 LP에는 내 70년대의 삶이(?) 고스란히 스며있다.
지금처럼 오디오 시스템이 발달하지 않았던 그 시절
음악을 듣기 위해서는 음악 감상실이란 곳을 가야했다.
고딩때도 몰래 드나들었던 종로통 음악감상실.
지금 종로 2가에 있던 3층짜리 건물
1층은 '희다방' 으로 주로 가요를 들을 수 있었고, 2층은 '칸토 (나중에 무아로 이름이 바뀜)
는 주로 pop을 듣던 곳, 3층은 '르네상스'로 고전음악 감상실이었다.
1층 희다방은 거의 안가고 주로 2, 3층 단골이었다. ㅋ~
2층 칸토에 가면 DJ 가 의례 king crimson의 'epitaph'을 들려주었고
서울시내에서도 몇군데서 들을 수 없었던 샹글리라스의 음반을 거기가면 들을 수 있다는 이유로
거의 매일을 드나들었던거 같다.
그때도 지금처럼 철이 없기는 마찬가지
그때 티나 크랙커가 50원에 다방 커피값이 50원이어서 100원이면 점심을 해결했던 시절
(뒤에 결혼 해서 소마니 살 때, 첫애 임신해서 제일 먹고 싶었던 게 바로 이 티나 크랙커였다 ^.*
물론 울 신랑 퇴근해서 오는 길에 옷속에 티나크랙커 한 판씩 있었다 )
너무나 가난했던 내 대학시절은 그것도 힘들었지만
그 점심 굶어가며 모은 돈으로 LP 판을 샀다. 쯔쯔~
그러니 내가 이 음반을 어찌 쉽게 버릴수 있으리~
얼마전에 혼자 수지에서 근사하게 살고 있는 친구집엘 갔었다.
고전음악 메니아인 그 아이는 거실에 브라운관까지 딸린 오디오를 가지고 있었다.
그 애가 좋아하는 말러를 들으면서 어찌나 부러운지
이 기회에 나도 함 설치해 볼까 욕심을 부렸는데 만만치 않다.
중고도 한 300 정도 들었다니 말이다.
누구 집에 안듣는 턴테이블 있음 저 주세요!!
지금 종로 거리는 더 번화해지고 유흥업소들로 흥청거리지만
70년대는 주로 학원가였다. 그래 지금 그 거리에 서면 왠지 그때 그 고즈넉함이 그리워진다.
르네상스에서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을 들어야 왠지 으쓱하는 기분이 들던 그 시절
몇 해전 그 건물이 없어진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렸을 때
가슴에 추억하나가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가을이면 그 거리에 물들었던 은행나무마저
내게는 색다르게 느껴졌던 그 기억은 아마
씽씽 정신없이 돌아가는 디지털 시대에
내 삶 귀퉁이 여백처럼 남아있어 더욱 그리운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