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새로운 나를 찾기위하여

edina 2006. 3. 20. 14:32
 

 늘 해오며 살았던 일들을 하는데도 요즘 들어 무척 힘에 부치는 것을 보니 내 나이를 실감하게 된다.

  저녁 준비를 하기전에 아직 남아 있는 해의 꼬리를 잡고 잠시 집 근처의 산에 오른다. 게으른 성격 탓에 나는  헉헉대면서 힘들게 등산을 하는 일 보다 이렇게 산책할 수 있을 정도의 얕으막한 산을 좋아한다.   산은 이미 봄 준비를 마치고 파릇한 새싹들을 피워내고 있다. 
  
  요즈음 내 주위의 사람들은 두 유형으로 나뉘고 있다.  하나는 지금껏 살아온 생활을 정리하고 남은 생을 좀 더 여유있게 살겠다고 퇴직을 하는 사람과 좀 더 높아지고자 뒤늦게 학위니 연구니 하는 일에 몰두하는 사람....
 

  준비없이 퇴직을 하여 느슨해진 시간을 주체하지 못해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도 보고, 일과 공부에 찌들어 얼굴에 늘 주름을 달고 사는 사람도 보고 있다.  어느 편이 더 나은 것이라고 내가 평가할 수는 없지만 높은 자리를 바라고 허덕대는 사람이 좀더 측은하게 생각되는 것은 아마 앞으로 내가 선택할 여지가 더 크기 때문 일 것이다.

 

  남편은 '일 중독증'인 것처럼 살았다. 그가 일없이 휴일을 보내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고, 우리 가족이 지금 살고 있는 이곳으로 이사하게 된 이유도 실은 도심을 벗어나 보고자 하는 것도 있었겠지만 이런 남편의 편의를 위함이었다. 
 

  그러던 그가 몇 년전 갑자기 쓰러졌다.  병명은 스트레스로 인한 협심증이란다.  다행히 응급 상황을 넘기고 잘 수습이 되었지만 그때의 경고로  그의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얼마 전에 드디어 사업소 장으로 자리를 옮기었다. 물론 그곳에 계속 머무르면 더 이상 승진은 없단다.  그러나 요즘의 남편을 보면서 높은 자리가 다 무에 소용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하곤 한다.  시간의 여유로움을 즐길 줄 알게 되었고, 그 동안 잊고 살았던 것들을 스스로 챙길 여유도 얻은 것 같아 보인다.  처음엔 '한 이년만 잠시 쉬어야지'를 입버릇처럼 달고 있더니 어느날인가 부터 이말도 슬그머니 사라졌다.  나 역시도 ' 이제 우리 그만 편안하게 시간을 즐기며 살자'고 다독인다.
 
  평소에 내가 무척 좋아하던 김정택 신부님의 짧은 글을 보았다.  그 분도 1년간의 안식년을 얻어 히말라야를 다녀오셨단다.  그러면서 ' 인생의 內向期' 이야기를 하셨다.  칼 융이 자신과의 무의식 대면에 나선 시기를 일컫는 것이기도 한 이 말은 나 자신을 드려다 볼 시기가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란다.
 

  인생의 어디쯤에서 나를 드려다 보아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영영 그 '드려다 봄'을 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무언가와 끊임없이 경쟁했을 때 그 대가로 지불되었을  내 영혼의 무게가 얼마나 되었을까도 궁금하다.  과연 나는 그 만큼 무엇을 남겼을까?  아파트? 은행통장들..?
  이제 나도 인생의 內向期를 맞이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이제는 소유하는 인간(men of having)이 아니라 존재하는 인간(man of being) 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